동북삼성 “고구려” 옛터에 살면서, “고구려”를 알자

 
[김충정의 중국기행=동포세계신문] 중국 동북삼성에 살면서 중국에 있었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에 대하여 모두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고구려와 발해에 대하여, 북한, 한국, 소련, 몽고, 일본, 중국의 역사학계에선 지금도 분쟁이 심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내일이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생각난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고대사. 혹은 조상에 대하여 대부분은 신격화시켜, 그 민족으로 하여금 자존심을 갖게 한다. 현대인의 안경으로 그 진위를 따지는 행위 자체가 남들의 웃음거리로밖에 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하여 본다.

신화는 신화일 뿐이다. 신화에서 진실이 있다면, 신화라 하지 않는다. 신화중의 특정인물을 비하하거나 모독한다면 좋은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여본다. 특히 종교에 한해서는 심중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 이집트, 유럽이나 중국 등 모든 국가들은 그들의 조상에 대하여 신격화하였다. 한반도도 마찬가지. 고구려, 신라, 백제 모두, 각자의 시조에 대하여 신격화 되었다. ‘길림성 내부자료 고구려 발해 유적소개(박학봉, 장월영 저, 1995)’에 나와 있는 고구려의 주몽 탄생이야기와 수도 변천 이야기를 소개한다.

: 고구려의 시조 주몽 신화.

고구려의 주몽은 어떨까?!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가 하백의 딸 유화를 만나 웅진산 및 앞록가에서 같이 살았는데. 해모수는 하늘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았다. 유하의 부모가 그를 책망하여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 귀양 보내였는데. 북부여 부르왕의 아들 금와를 만났다.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가 집에 두었는데 해가 몸을 따라가며 비추었다. 이로인해 잉태되어 알 하나를 낳았는데, 왕이 버려서 개돼지에게 주어도 먹지 않으며, 길에 버리면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덮어주었다. 왕이 깨뜨리려고 해도 깨뜨릴 수 없으니 그 어미에게 주었다.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나왔다. 이 아이가 주몽이다.

 

: 고구려의 수도 변천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건립되어 기원 668년까지, 705년 존속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16. 고구려는 그가 존속하여 온 전 기간 수도를 네 곳에 정하고 세 번 천도하였다.

 

1: 처음 수도는 흘승골성(紇升骨城ㅡ오늘의 요녕성 환인현내 오녀산성)이였다. 광개토왕 비문에는 흘본 <<삼국사기>>에는 졸본 <<위서>>에는 흘승골성으로 모두 지금의 오녀산성을 이르는 말이다. 흘본이 어디에 있나?! 흘본이 오녀산성으로 고문에는 모두 비류수가에 있다고 하였는데, 비류수는 오늘의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이다.

 

2: 두 번째 수도는 국내성(國內城)이다. 첫 번째로 수도를 옮긴 것은 기원 3(유리왕 22) 흘승골성에서 국내성(오늘의 길림성 집안현, 현성)으로 천도한 것이다. 집안으로 옮기게 된 것은 그곳이 산세가 북쪽에서 오는 적을 막는 데 유리하고, 산이 북풍을 막고 있어 아늑하고, 땅이 비옥하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수도는 안학궁(安鶴宮)이다. 두 번째로 수도를 옮긴 것은 기원 427, 국내성에서 안학궁으로 옮긴 것이다. 안학궁은 지금의 북한 평양시 대성산 일대. 대성구역. 안학동에 있다. 이번 천도의 원인은 그곳이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매우 좋은 위치에 있었으며, 교통 요충지었기 때문이다.

 

4: 네 번째 수도는 장안성(長安城)이다. 세 번째로 수도를 옮긴 것은, 586, 안학궁에 장안성(오늘의 평양 시내)으로 옮겼다. 장안성 건설은 552년부터 시작하여 35년의 긴긴 시간을 들여. 완공 하였는바. 총 길이가 23킬로메터의 큰 성벽으로 당시 동북아의 강국이었던, 고구려 수도의 위용을 시위하고 그 경제적 위력과 문화수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7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통치계급 내부의 모순과 라 당 연합군의 침공에 의하여, 668년에 멸망하였다.


고구려의 유적은 환인의 오녀산성. 집안의 국내성, 평양의 안학궁과 장안성에 집중되어 있는데 본문에서는 동북 경내에 있는 유물들에 대하여 서술하려 한다.

 

:길림성 집안현 국내성 부근의 유적

 

필자가 고구려 옛터에 살면서, 고구려 수도 집안을 찾아 가기는 두 번이다. 1994년 길림성 사평에서 길림성 도로 공정 학술회의에 참가하고, 기차로 집안에 내리니 노새, 자전거, 사람이 끄는 인력거에서 나는 소리가 귀청을 때렸고, 먼지가 나는 골목길이 가로 세로로 뻗어 있었다.

두 번째로 집안을 찾을 때는 2009516일이었다. 두망강 변과 압록강 변으로 백두산, 통화 등을 걸쳐 집안에 가니 지난 번에 길림, 심양 등을 지나 집안에 갈 때의 비용 300 여 위안이 31위안이 되었다. (화룡에서 통화까지 23위안, 통화에서 집안까지 8위안)

집안에서 내리니 예전에 보이던 인력거는 없어지고 공공버스와 택시들이 손님들을 기다렸다. 서울거리와 다를 바 별로 없는 큰거리 옆에는 10층 되는 건물들이 줄줄이 늘어져 있고 나이트 클럽이나 노래 방에서 나오는 멜로디는 한국의 음률과 다른 바 없었다.

집안의 특점이라면 돌이 많은 것이 돌출하다. 고구려를 돌 나라라 한다면, 고구려 사람들을 돌 사람이라 하면 타당할 것이다. 돌사람 때문에 수양제가 살 수에서 망하고 . 돌 영웅 연개소문 때문에 당 태종 이세민도 고구려를 업수이 여기지 못하였다.

집안의 볼거리는 아주 많다.

 

1: 성터, : 국내성, 환도산성, 패왕산성과 관마산성,

2: 비석과 석각 ; 호태 왕비. 인면석각, 고구려 무덤비.고구려 돌 기둥.

3: 무덤 : 태왕릉, 장군분, 천추무덤, 동구 옛 무덤군, 장천 옛 무덤 떼, 대고려묘자구 무덤 떼, 간구자 적석무덤

4: 무덤 벽화: 각저묘, 무용묘, 동구 12호 무덤, 5괴분 4호 무덤

 

: 요녕성 환인현 경내의 고구려 유적

오녀산성은 고구려 시조, 주몽이 처음으로 수도를 쌓았다고 하는 산성이다. 오녀산성은 환인현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8,5키로미터 거리에 있는 오녀산(五女山, 해발 620메터)의 남쪽 등성 두 개를 포괄하여, 쌓은 성으로서, 남북길이 약 1000메터, 동서너비 약 300메터. (총 길이 2440메터) 되는 비교적 큰 산성이다. 성은 동남쪽으로 좀 큰 골짜기를 끼고 있고 서남, 동북 쪽에 약간 낮은 곳이 있으나 서쪽, 북쪽 및 동북쪽의 대부분은 깍아지른듯한, 수십메터 높이의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는 혐요한 지대를 리용하여 쌓았다. 환인현 부근에 흘승골성 외에 기타 유적들도 많이 있다. 1) 오녀산성. 2)흑구산성. 3)하고성자성터, 4)미창구 벽화 무덤, 5)고구려 서부의 천리장성

 

: 연변지구의 고구려 유적

1) 성자산 산성 : 도문시 장안향 마반촌 산성리툰 서쪽 성자산에 있다.

2) 흥안 옛성.: 연길시 흥안향 흥안촌에 있다. 연길로부터 왕청으로 가는 공로가 성터의 동 쪽을 지나가고 있다

3) 토성툰 옛성 : 룡정시 팔도향 서산촌 토성툰에 있다.

4) 살기성 :훈춘시 양포향 양목립자촌 동남 약 1.5킬로미터 곳의 남산우에 있다.

5) 온특 혁부성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에 있다.

6) 석두하자 옛성 :훈춘시 반석향 태양촌,번가 툰에 있다.

7) 중평 옛성 : 용정시 덕신 향 안방 촌,중평 툰,동쪽

8) 연변 옛 장성: 연변의 옛 장성은 두 곳 . 하나는 훈춘벌 북부를 에워싼 장성이고. 다른 하나는 화룡 시 평강 벌과. 연길 분지의 서쪽과 북쪽을 둘러싼 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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