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포 1세들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3월 18일 오후 1시 한강성심병원장례식장 발인후 故 이철구 회장 영정사진을 고향 친구인 안상경씨가 들고 나왔다.

3월 18일 오후 1시 한강성심병원장례식장 발인후 故 이철구 회장 영정사진을 고향 친구인 안상경씨가 들고 나왔다.

2005년 귀한동포연합총회 공동대표 5명 중 한명으로 선출되어 국적회복 중국동포 단체 구성에 앞장서고 2011년에는 동포세계신문에서 발족한 국적회복 중국동포 희망연대에 창립멤버로 활동하며 동포 권익에 앞장 서온 이철구 회장(흑룡강성 연수현)이 구로고대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향년 82세 나이로 317일 별세하였다. 20167월경 척추암 진단을 받아 치료를 받아오면서 한동안 회복세를 보였지만 급격히 건강악화 끝내 숨을 거둔 것이다.

2009년 일본 히토츠바시대학 사회학연구과 박사과정 재학시절부터 중국동포 연구활동을 해온 오태성 본지 연구원(아바라키 기독교대학 강사)은 한국에 들어와 이철구 회장 사망 일주일 전인 3월 9일 고대구로병원을 병문안을 해 마지막 인터뷰를 가지기도 하였다. 이철구 회장의 사망소식을 접한 오 연구원은 동포세계신문에 이철구 회장을 회상하며라는 장문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 내용을 전문 게재한다.[편집자 주]

 

[오태성 본지연구원=동포세계신문] 2018317(금), 단체 활동을 통해 동포 1세와 국적취득 중국동포의 처우개선을 위해 헌신하신 이철구 회장님이 타계하셨다. 향년 82세였다. 다행히 필자는 이철구 회장님이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에 입원 중인 구로고대병원을 방문해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한동안 무엇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말문을 열 수 없었다. 10여 년간 그분과 함께한 기억들과 그간의 인터뷰기록 등을 통해 이철구 회장님을 회상해 본다.
 

  중국이주와 라디오방송

이철구 회장님은 1938년 경북 의성에서 출생했다. 6살이 되던 1943년에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이주했다. 이때 소학교 3학년인 큰누님만 한국에 남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흑룡강성 연수현에서 생활했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습을 했다. 17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동생 3명을 데리고 있었다. 18살이 되던 해 졸업했던 소학교 교장선생님께서 학교에 나와 달라고 해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3년 동안 함수(통신교육)를 통해 정식으로 교사자격증을 땄다. 한국에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약 35년간 제직했다.

 

중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라디오 전파를 통해 한국의 KBS 사회교육방송을 듣게 됐다. 그때는 문화혁명기라 조심스럽게 들었는데, 80년대 중반부터는 자유롭게 들었다. 라디오방송을 통해 한국의 실정을 제대로 알게 됐다. 이산가족을 찾는다는 것을 알고 혹시나 하고 누님을 찾는다며 방송국에 편지를 보냈다. 행여나 답장이 올까하고 기대도 안했는데, 1990년 봄에 흑룡강 방송국을 통해 부산에 사는 누님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재방송할 때 그 내용을 녹음을 해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연락이 닿아서 한국에 있는 큰누님으로부터 초청장이 날아왔다.

 

한국귀환과 국적회복

큰누님을 만나기 위해 일찍 퇴직하게 됐다. 그리고 199210월 드디어 고국 땅을 밟게 됐다. 할빈에서 열차를 타고 대련까지, 대련에서 다시 배를 타고 위해로 왔다. 또다시 위해에서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다. 이런 긴 여정동안 47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을 때까지 어떤 기대와 설레임이 있었는지 상상해 본다.

 

당시 친척 방문한 1세의 경우, 합법적인 체류기간 내에서 신청을 통해 한국국적 취득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철구 회장님은 3개월 체류기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됐다. 부랴부랴 서류를 준비해 달려간 출입국관리국에서는 불법체류자라고 해서 서류 접수를 거부했다. “내가 왜 불법체류자인가. 난 분명히 여기서 태어나서 6살까지 자랐다.” 이 말에 담당공무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런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20039월 말부터 시작된 국적회복운동’(고향에 와서 살 권리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단순히 불법체류자라고 보지 말고, 역사적으로 봐야한다.” “나는 여기서(한국) 태어났고, 여긴 조상님의 땅이고 우린 단국의 후손이다.” 이철구 회장님은 항상 식민지, 해방, 분단, 세계화라는 한반도를 둘러싼 일련의 역사적 변모와 연속성을 강조한 것 같다. 이 일련의 과정이 중국동포를 새롭게 인식하게 했고, 또한 귀환과정을 통해 우리안의 타자인 조선족도 만들어졌다.

남은 여생을 조국 땅에 묻자라고 생각해 2004년에 국적을 취득하게 됐다. 처는 고향이 이북이라서 같이 신청을 못했다. 국적은 가졌지만 한국생활은 여유롭지 못했다. 교직생활이 길어서 힘든 일은 해보지 않았다. 또한 동포1세에 대한 우대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한국에서의 생활과 단체조직

처음 한국에 와선 장미농장에서 아내와 일을 했다. 자신은 60만원, 처는 35만원을 받았다. 적은 돈이었지만 돌이켜보니 그 돈이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부산에 계신 누님 집에 있다가, 한국에 나와 있는 제자들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1994년 구정을 쇠려고 서울역에 기차표를 사려고 들어가는데 눈앞에 글귀에 발을 멈추게 됐다. “발길은 일터로 눈길은 세계로.” 한참동안 그 문구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눈앞에 이익보다는 크게 생각해야 한다고 느낀 것 같다. 7년간 건설회사 직영반장으로 있다가 이후 건물관리도 했다. 조선족교회를 알게 되어 10여 년간 동포면담활동도 했다.

국적회복을 한 뒤에는 서울조선족교회 서경석 목사님의 제의로 국적 회복자들의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2달 동안 준비해서 20058재한동포연합총회를 결성해서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20071229일 흑룡강 연수현 사람들과 함께 '재한연수향우회'도 만들었다. 그리고 2009년에는 국적취득동포생활개선추진위원회’, 2011년에는 동포1세와 국적취득 중국동포의 처우개선을 위해 중국동포희망연대도 조직했다.

 

못 다 이룬 꿈 그리고 조선족의 장래

역사는 말을 한다.” 즉 역사는 흔적을 남긴다는 말이다. 그간의 활동을 기록하고자하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이루진 못했다. 특히 귀환동포연합총회에 대해 어제, 오늘, 내일의 내용으로 책을 쓰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조선족의 장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생각해 왔다. 하나는 젊은 조선족에 대해서이다. 명동에 있는 화교학교에 두 번 찾아간 적이 있다. 그들은 한국에서 소수민족이지만,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교육을 통해 가르치고 있었다. 중국의 조선족학교는 한국을 포함한 해외로의 부모들의 이주를 통해 재학생 수가 줄어가고, 중국 내 도심의 이동을 통해 한족학교에 진학자가 늘어나는 등 점점 우리글, 우리말에서 멀어가는 것을 우려했다. 천안에서 열린 엑스포에 가는 도중 우연히 들른 식당에서 40대 중반의 식당주인(한족)할아버지 나라가 내 조국이라고 말했다. 젊은 조선족들도 자신의 조국을 중국이 아닌 한국으로 생각하도록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젊은 조선족의 장래에 대한 칼럼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젊은 조선족들에게 한국에 대해 바로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또 하나는 동포1세에 처우개선이다. 이를 위해서 단체 활동을 통해 많은 노력했지만 개인/단체 간의 이해관계, 자신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필자가 면회했을 때 처우개선이 이루워지지 못한 점을 끝내 아쉬워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동포 1세들은 취업이 제한되어 있는 현실에서 20여만 원의 노년연금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다. 기초생활수급, 임대주택 여부가 생활에 영향을 주겠지만 이 점은 동포 1세의 처우에 격차를 발생시키고 있다. 이철구 회장님도 타계하시기 전 수급을 받지 못해 많은 여러움이 있었고 이로 인해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면서 생활한 것 같다. 현재의 동포 1세의 현실은 이철구 회장님의 자신의 처우와 일맥상통한다. 한국에서의 2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철구 회장님의 생활은 어떤 것이였던가. 그리고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이철구 회장님의 타계처럼 1세들의 목소리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이철구 회장이 '자녀들이 못들어오고 있다'는 피켓과 함게 주민등록증을 들어보이며 당당한 국민이며 유권자임을 내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2012년 4월6일 보도)
이철구 회장이 '자녀들이 못들어오고 있다'는 피켓과 함게 주민등록증을 들어보이며 당당한 국민이며 유권자임을 내보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2012년 4월6일 보도)

(아래 내용은 20124월 국적회복중국동포희망연대 이철구 회장이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동포집회에서 발언한 내용 중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우리의 조국이라 생각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일제시대에 부모님의 손을 잡고 등에 업혀 만주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고향인 한국땅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남북이 분열되고 오는 길이 막혀 돌아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제시기를 지나 해방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1949.10.1) 되기 전까지는 학교에서 애국가를 배우고 대한민국이 우리의 조국이라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야 했지만 우리의 뼈아픈 역사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반평생을 살지 못하고, 1992824일 한중수교가 이루어져, 하늘길이 열리고 바다길이 열려 조국인 한국땅에 한국의 친척 초청으로 올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한국에 오게 되었냐구요?

 

우리의 부모님은 살아생전에 내가 죽더라도 네가 돌아가 살아야 할 나라는 한국이다. 거기에 너의 고향이 있다. 우리의 부모님은 한국을 매우 그리워하며 하루 한날도 잊지 못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제 고향은 부산입니다. 큰 누님은 부산에서 사셨고, 저는 부모님을 따라 만주로 6세때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중수교가 이루어진 후 저는 부산에 사는 누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날을 저는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에 와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토록 부모님이 네가 돌아가 살아야 할 곳이라 하였던 대한민국이라 하였건만 대한민국은 우리를 중국인이라 하면서 이방인 취급하고 반겨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교사생활을 30여년 넘게 해온 사람입니다. 저는 도저히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004년 동포단체에서 우리는 고향에 돌아와 살 권리가 있다는 목소리를 내며 법무부에 5000명 가량이 집단으로 국적회복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헌법소원을 낼 때에 저는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결과 20045월경 대한민국은 국적법을 개정하여 우리와 같은 사람들. 1949101일 중화인민공화국인 생기기전에 출생하고 한국에 호적상에 기록이 있거나 친인척이 있는 사람들이 국적회복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2005년 대한민국 국적으로 떳떳하게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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