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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편] ‘해란강초두부’ 최미애 이야기 ⓵ 내 고향은 연변의 충청도 마을 ‘정암촌’

연길서시장에서 초두부 만드는 법 배워

동포세계신문 편집국 기자 | 2019.03.22. 10:47 kakao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정암촌 위치도(좌), 과거의 정암촌(중앙)과 현재(우) 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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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2018년 가리봉동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서울시, 구로구 지원)에 참가한 한중문화학당 가리봉텔러팀 임영상(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림학(한국외대 박사과정)이 구술인터뷰를 하고 정리 작성하여, 가리봉사람이야기(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연변의 충청도 마을 정암촌

 

최미애는 1961년 훈춘시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는 1927년 용정 태생으로 훈춘 문공단에서 가수 생활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1925년 출생으로 13세에 조선 온성에서 이주해온 이주민이었다. 41남의 중간 셋째 딸로 태어난 미애는 부모님을 지극히 섬겼던 효녀였고, 지금도 형제자매들을 끔찍하게 위하고 있다. 그녀는 늘 가난과 싸웠지만, 가난을 물려준 부모님을 원망하는 대신에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가난이 그녀를 강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미애의 아버지는 훈춘 문공단에 속한 가수였다. 그러나 당시 가수는 딴따라라 했고 보수도 적었다. 때문에 그는 훈춘 운수장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그는 사냥에 능했는데, 한 번 사냥을 나가면 하루에 꿩 열 마리 정도를 잡아오곤 했다. 그런데 그는 일을 하다 다쳤고 딸 셋을 키우기 위해서는 시골에 가서 농사일을 하면서 사냥을 하는 것이 낳겠다고 생각했다.

 

미애가 두 살 때인 1963년 아버지는 평생 환자였던 아내를 위해서도 시골생활이 좋을 것으로 생각해 온 가족을 데리고 정암촌으로 들어왔다. 정암촌 사람들은 미애의 아버지를 꿩을 잘 잡는 포수로 기억하고 있는데, 정암촌은 충청도에서는 사라진 <청주아리랑>이 보전되어왔던 연변 속의 충청도 마을이다.

미애는 고등학교는 량수에서 다니게 되었는데, 그 때 문화대혁명이 끝난 해였다. 미애는 대학에 가고자 했다. 경쟁률이 100:1 정도일 정도로 대학에 들어가기가 무척 어려웠다. 아깝게 2점차로 대학에 떨어지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당시 교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교사일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당시 교사 월급은 60원 정도였는데, 가난을 벗을 수가 없어 1983년 정암촌을 나와 용정으로 나왔다.

 
정암촌 : 1938년 충북 사람들 80여 가구가 집단이주하여 정착한 마을. 한국에서 사라진 청주아리랑이 전수되어왔다. 1992년 임동철 교수가 정암촌을 알게 된 후 충북대 교수연구팀이 정암촌과 청주아리랑을 연구했으며, 정암회를 조직하여 정암촌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또한 매년 여름마다 충북대 교수-학생봉사단이 정암촌에 들어가고 있다.




해란강의 고장 용정
, 그리고 연길

최미애 씨 용정에서 미애는 미싱이라고 했던 복장 기술을 배워 복장점을 차렸다. 당시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을 통해 자영업이 발전하던 때였다.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1987년 딸 은희를 낳았다. 당시 남편의 월급이 250원 정도였다. 당시 부모님은 정암촌에서 나와 량수진에서 살았는데, 부모님 집에 가보니 오막살이 집이었다. 어머니가 5, 10년 더 사실 것인데... 이런 집에서 못 살겠다고 생각해 그녀는 무작정 사고를 쳤다. 1000원짜리 집을 샀다. 갓난아기를 업은 채로 이사를 시켰다. 집을 사놓고 올라오는데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 간호사였던 언니에게 부탁했다. 시어머니가 반찬가게를 하고 있어서 언니네의 생활은 괜찮았다. 그러나 한 집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경제권을 시어머니가 갖고 있어 언니는 시어머니한테 말을 못하고 동서한테서 빌려서 주었다. 그래서 항상 압박감이 있었다. 미애는 원래 남에게 돈을 꾸는 사람은 아니었다. 미싱 일을 배운 최미애는 이미 혼자서 바바리까지 만들 정도가 되었다. 아이를 낳고 바로 다시 복장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눈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좀 더 산후조리를 해야 했어야 했다. 아이가 하도 순하고 울지도 않아 아이를 옆에 놓고 바느질을 했는데, 시력이 확 가면서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아파 복장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바느질을 할 수 없었다. 부모님 집을 사기 위해 빌린 돈은 갚아야 했다. 눈이 안 보이니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했는데, 언니 시어머니가 무릎이 아파서 반찬가게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언니와 형부가 연길에서 초두부 장사를 해보겠냐고 물었다. 무작정해야 했다. 그런데 조금 부끄러웠다. 젊은 각시가 반찬가게를 어떻게 하겠느냐? 그때 28살이었다. 어릴 때 무엇 못한다는 소리는 듣지 않았다. 또 자존심이 있었다. 젊은 각시라고 못할 게 무엇인가?


양념장을 한 초두부 연길 서시장
에서 반찬가게를 1년 정도 했다. 초두부를 어떻게 만드는지? 젊은 새댁 최미애는 초두부를 만드는 것을 연구한 끝에 맛있는 초두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때 시장에서 네 사람이 함께 장사를 했는데, 미애의 초두부가 다 팔린 뒤에야 다른 사람들의 초두부가 팔렸다. 그러다가 남편이 다시 용정에서 직장생활을 하게 되어 연길 생활을 그만두어야 했다. 언젠가 기회가 생기면 초두부 장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살기가 힘들었다. 출가외인이라지만, 두 집 살림을 하려니 힘이 들었다. 부모님이 살기 어려워 미애 씨가 도와야 했는데, 어머니가 관절이 아파 걷지를 못해 용정에 모셔온 터였다. 몸이 조금 나아지자 미애 씨는 북한 장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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