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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편] ‘해란강초두부’ 최미애이야기 ⓷ 1998년 한국생활 5년

"엄마는 돈 밖에 몰라" 어린 딸의 울먹임에 다시 중국행

동포세계신문 편집국 기자 | 2019.03.22. 11:24 kakao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한중문화학당 가리봉텔러팀이 제작한 2018 가리봉스토리뱅크 구축사업 가리봉 사람 4명의 이야기를 담은 포스터 를 들고 기념사진  

<본문은 2018년 가리봉동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서울시, 구로구 지원)에 참가한 한중문화학당 가리봉텔러팀 임영상(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림학(한국외대 박사과정)이 구술인터뷰를 하고 정리 작성하여, 가리봉사람이야기(소책자)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198천원
최미애 씨 홍콩을 다녀와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딸 은희가 11살이 되었는데, 마음이 허전했다. 한국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서 계속 한국이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이제 북한 장사도 잘 안되고, 인민페 5만원을 들여 비자를 신청했다.직방에 떨어졌다. 혼자 한국에 가는 것이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남편이 딸아이를 잘 돌보아주었다. 3년만 벌고 온다고 생각했다.

1998
12월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언니가 먼저 한국에 와서 건대입구역 근처의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중국동포들도 얼마 없었던 때였다. 한국이 좋을 줄 알았다. 환경은 깨끗하고 다 좋은데 마음이 얼어붙었다. 남편은 택시 사고가 나서 또 일을 그만 두었다. 3점 이자였는데, 여기서 어떻게 돈을 벌어 빚을 갚지? 걱정을 많이 했다. 한 달 정도 언니가 일하던 식당에서 일하다가 언니의 소개로 속초에 갔다. 왕갈비집이었다. 휴대폰도 없고 삐삐만 있었다. 그런데 그 집이 다른 집에 인수인계를 하게 되어 한 달 있다가 돌아왔다. 벌써 3-4개월이 흘러갔다. 5만원(당시 한국돈 1천만 원)을 어떻게 값지?
 
한국돈 198천원만 있으면 티켓을 사서 중국 용정 집으로 가고 싶었다. 5만원, 한국돈으로 1천만원은 생각도 안하고 집에 가고 싶었다. 첫째 말이 통하지 않았다. 강남고속터미날 횟집에서 일했는데 말이 들리지 않았다. 중국사람은 회를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음식 명칭도 모르고 용어도 일본말로 하기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너무 들리지 않아 처음에는 자신의 귀가 먼 줄을 알았다.
 
횟집에서 두 달 일하다 노가다 띠좌안(타일/瓷砖)을 붙이는 일을 하였다.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으니 스트레스를 덜 받아서 좋았다. 충청도 마을 정암촌에서 20년을 살아 충청도말을 많이 썼고, 또 용정에서도 10년 정도 살아 연변말을 했다. 그래도 역시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노가다 일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때 한 친구가 목욕탕에 가서 때밀이를 하면 돈을 많이 번다고 했다.

비암산에서 내려다 본 용정
 
때밀이로 돈을 벌다

식당에서 일하면 월 75만원 벌었는데, 목욕탕에 가면 월 100만원을 번다고 했다. 그때 마침 한국이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서 환율이 인민페 1원에 한국돈이 4.4원밖에 되지 않았다. 100만원씩 벌게 되면 2년이면 빚을 다 갚을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학원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무슨 때를 미는데 학원에서 배워야 하는지?
 
친구랑 함께 학원에 갔다. 한국 아줌마들이 배우고 있었다. 중국사람은 친구와 두 사람이 전부였다. 사실 중국사람들은 때를 미는 것을 천한 일로 생각했다. , 한국사람들은 때를 혼자 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밀어주어야 하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로지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학원에서 10일간 때를 미는 기술을 배웠다. 한국 아줌마들에게 왜, 때밀이를 하려느냐고 물었다. 남편의 사업이 부도나는 등 모두 사연이 있었다. 한국 아줌마들도 하는데 우리가 못할 것이 있겠나.
 
익산시 거북목욕탕이라는 곳에 취직했다. 그때 얼마나 서툴렀으면 손님이 나보고 누우라고 하고 나에게 해주었다. 그래서 때밀이 일도 못할 것 같았다. 또 여름철이 되어서 일도 적었다. 10월부터 잘 된다고 해서 식당 일하다가 다시 때밀이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서울) 옥수동의 한 식당을 소개받았다. 그런데 역시 말도 잘 안통하고 자존심도 상해 두 달만 일했다. 오로지 빚을 갚겠다는 생각으로 월 100만원을 받기로 하고 군산의 사우나로 일하러 갔다.
 
군산에서는 주인 할머니 한 분과 같이 먹고 자면서 일했다. 군산에서 처음 100만원을 받았다. 2년이면 빚을 다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열심히 일했다. 중국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사우나가 또 다른 사람한테 넘어갔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군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범계역 근처에 큰 목욕탕이 생겼다. 그 집은 장사가 잘 되었다. 3명이서 같이 일했는데, 많이 벌 때는 하루에 30만 원 정도 벌었다.
 
13개월 만에 한국에 오느라 빌린 인민페 5만원 빚을 다 갚았다. 범계역 사우나에서 만 4년 일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때를 밀어준다는 것이 자존심도 상했다. 중국에서는 딸과 어머니 두 사람밖에 때를 밀어준 사람이 없었다.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 손님을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자고 했던 것이다. 겨울에는 400-500만원, 여름에는 250만 원 정도 벌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저축은 다른 친구의 계좌로 저축했다.
 
처음에는 한국살이가 잘 적응이 되지 않아 편도 비행기 값 198천원만 있으면 바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점차 한국생활에 적응이 되고 진짜 장사도 잘되어 수입도 크게 늘어났다. 다만, 11살에 헤어진 딸 은희에게는 참으로 미안했다. 딸과 통화를 할 때마다, 이제 중국에 돌아오느냐? 봄에 전화하면, “가을에 간다.”고 대답했다. 다시 가을에 전화할 때는 또 겨울에 간다.”고 대답했었다. “엄마 1년만 더하고 들어갈게.”라고 했는데 5년이 된 것이다.



해란강 초두부 최미애 - 김은희 부녀와 임영상 한국외대 명예교수

엄마는 돈밖에 모른다.” 5년 만에 중국에 들어가
엄마는 돈밖에 모른다.” 딸 은희의 울먹임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돈을 벌어서 무엇 하겠는가? 공부를 잘했던 딸이 문제아가 되었다. 중학교 때 반에서 늘 3등 이내에 들었고 성격도 온순했는데. 은희는 공부는 아예 담을 쌓고 날마다 왕바(网吧), PC방에서 살고 있었다. 결국 최미애는 200312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대학공부를 못했던 자신을 생각하면서 딸아이를 돌보아야 했다.
 
딸 은희는 엄마에게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엄마는 다시 한국에 가서 돈을 벌라고 했다. 그러나 최미애는 한국에 갈 수가 없었다. 딸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엄마는 본능적으로 알아채었다. 갑자기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돈 벌러 나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1년간 딸과 함께 있었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불법체류자들이 자진출국하면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는 정책이 나왔다.그래서 20043,합법비자를 받기 위해 다시 한국에 왔다. 이후 딸 은희를 위해 자주 중국을 다녀오는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보증금을 내야하는 목욕탕 일은 할 수 없어서 이태원에서 식당 주방장 일을 찾았다. 음식을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은희는 용정1중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용정2중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은희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고 한국에 가라고 했다. 성적이 바닥이었던 언니의 아들도 3개월 바짝 공부하고 학년 우등으로 졸업하고 천진대학에 들어갔다. 은희도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열중하여 성적이 크게 올라갔다. 그런데 대학 진학원서를 쓸 때 선생님들이 낮추어 지원하라고 했다. 그래서 연변대학 사학과에 들어갔다. 아쉬웠다. 중점대학에 지원할 수 있었는데, 이전의 성적을 감안한 것이다. 아무튼 20089월 연변대학에 들어감으로써 딸 은희는 제 자리로 돌아왔다. 등록금을 내고 또 학교 근처에 집을 샀다.
 
최미애도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와 목욕탕 일을 시작했다. 은희에게 보내는 대학교 학비가 아주 많이 들어갔다. 마침 같은 진산 최씨 고향 언니가 가리봉의 호프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와서 일해보라고 했다. 그때 최미애는 호프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어?” 고향 언니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정말 호프의 자도 모르는 사람이 남이 한다 해서 시작했다. 한 달 정도 일을 했는데. 이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호프집이 지금섬샤브샤브 옆의 호프집인데, 매일 술 먹는 사람만 왔다. 원래 술 먹는 사람을 싫어했었다. 그래서 다른 언니가 초두부 집을 하겠느냐고 제의했다.

동포세계신문 편집국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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