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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봉동편] ‘해란강초두부’ 최미애 이야기 ⓹ 딸 김은희의 편지 : 내가 본 우리 엄마

동포세계신문 편집국 기자 | 2019.03.22. 12:26 kakao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어머니 최미애와 딸 김은희


<본문은 가리봉동 해란강 초두부최미애 씨의 딸 김은희씨가 쓴 글입니다. 2018년 가리봉동 도시재생 주민공모사업(서울시, 구로구 지원) 한중문화학당 가리봉텔러 제작 가리봉사람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엄마에 대한 감정들이 참 많이 변했다.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을 때가 있었고 제일 그립고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고 제일 불쌍하고 화나고 미안할 때도 있었다.하지만 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하나뿐인 우리 엄마. 엄마 딸로 태어난 게 참 행복하고 감사할 뿐이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을 때는 어릴 때. 엄마가 화장실 갈 때도 같이 가고 시장에 아기 데리고 다니기 귀찮아서 아빠랑 중국어로 시장 다녀온다고 얘기해도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듣고. (上市场 이란 것이 시장에 간다는 말이다. 나도 같이 가장~~~) 떼쓰고 같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엄마한테 전해 들음. 또 딸 네미 똑똑한 것 같아서 아주 기분 좋아 함. ㅋㅋ 내가 천재인줄 아는 우리엄마)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는데 어쩔 수 없이 엄마랑 같이 보내던 어린 시절 기억이 별로 없다. 41남 중 3째 딸인데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우리 엄마 혼자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돌보게 되었다. 우리 집 살림도 넉넉한 편이 아닌데 할머니랑 같이 살면서 아빠의 심술도 만만치 않았다.

은희 어릴때, 둘째 언니의 아들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미운 것도 있고 엄마형제들한테 원망도 있었을 것이다. 가운데서 제일 불쌍한 엄마는 이제 어께 짐이 무거워지니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연길에 가서 초두부 장사부터 시작해서, 북조선 장사와 러시아 장사, 나중에 홍콩까지. 그러다가 한국에 가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엄마도 한국에 가면 돈 많이 번다고 생각해서 한국에 가는 수속을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11살 때에 맨 처음 한국에 갔기 때문에 5년이란 시간을 나는 엄마를 전화목소리로만 만났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소학교(초등학교)때에는 멋모르고 잘 지냈는데.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내가 많이 변하기 시작했다. 늘 관심이 부족했던 것 같다. 엄마는 내년 설날에는 꼭 갈께 라고 얘기 해놓고 그날까지 손꼽아 기다리면 또 내년 설날 이렇게 몇 번을 약속을 안 지키니까 엄마가 원망스럽고 미웠다. 돈 밖에 모르는 엄마라고 엄마한테 소리 지르고. 왜 전화 하냐고 삐뚤어 질 거라고 협박하고 ...

 

내가 방황을 하자 엄마는 바로 돌아 왔다. 이때 엄마랑 엄청 많이 싸웠던 것 같다. 이미 나는 내 삐뚤어진 생활이 좋았고 엄마는 이제 와서 바로 잡으려고 했지만 더 모순만 커졌던 것 같았다. 엄마가 참 미웠다, 친구랑 약속하고 가출을 시도했다. 엄마 간섭 없이 신나게 놀았다.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내가 잘못됐을 까보아 속이 까맣게 타 들어 가고 잠도 못 자고 겨울 패딩 양쪽 팔은 눈물로 얼룩이 번져있고. 5kg 빠진 듯한 엄마 얼굴을 보니 참 마음이 아팠다.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ㅋㅋ) 태어나서 첨으로 엄마한테 맞았던 것 같다.


 
 

그 후 고등학교 3년을 엄마는 한국 중국을 오가면서 내 곁을 지켜주셨다. 엄마랑 약속했다. 이젠 다시 엄마 속 썩이지 않겠다고. 엄마한테 내가 전부 만큼 내가 잘하겠다고. 무난하게 연변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로는 엄마가 한국에 가게를 시작하여 엄마는 오지 못하고 방학만 되면 내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 가게 시작하게 된 것도 다 나 때문이었다. 대학교 학비랑 생활비를 거의 엄마가 혼자서 부담했어야 했지만. 엄마는 언제 한번 돈이 없단 얘기를 나한테 했던 적이 없다. 엄마는 참 강하셨다. 2008년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엄마가 한국에서 돈 많이 벌어서 중국에 보내주면 잘 살았다. 한국은 중국보다 발전했으니 엄마는 더 좋은 환경에서 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엄마가 이 돈을 어떻게 벌어서 보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참 많이 미안하고 엄마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살았는지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중국에서 보지도 못했던 단칸방. 문 열고 나오면 주방 겸 샤워실. 화장실은 공동화장실. 샤워를 집에서 하니까 집은 항상 축축해있고. 겨울엔 너무 추어서 샤워도 하지 못했다. 엄마가 보내준 돈으로 우리는 좋은 집에서 살고 엄마는 중국에 좋은 집에 있어도 보지도 못하고 다시 한국에 와서 이런 쪽방에 있어야 하다니. 사춘기 때 엄마한테 퍼부었던 말들이 머리에 생생히 지나갔다. 후회스럽다. 다행이 엄마가게 장사는 나날이 잘되었다. 엄마의 착한 인품이 손님들한테도 전달이 되었나보다.




한중문화학당 가리봉텔러팀과 최미애-김은희 모녀와 함께  



이젠 가게도 확장했고 엄마는 혼자 힘으로 참 대단한 성공을 하셨다
. 한국에 집도 마련하고 이젠 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인데. 엄마는 아직도 도전중이시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도 많다. 참 젊게 사는 우리엄마 항상 18세 소녀 같으시고 무슨 일이든 항상 낙관적인 생각만 하시는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 때문에 가족의 무거운 짐을 떠메고 산 것이 억울할 만도 한데. 나는 엄마가 형제들한테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는걸 보지 못했다.

지금도 형제 가족들한테 참 많이 베풀면서 살아가신다. 5형제 중 엄마한테 제일 아픈 손가락인 우리 막내이모. 안산에 계시는데 혹여 전화 한번 받지 않아도 난리가 난다. 딸인 나보다도 더 많이 관심을 기울이는 막내 동생. 엄마가 내 곁에 없을 때 나를 가장 많이 보살펴준 우리 둘째 이모. 동경성에서 방금 온 우리 큰 이모. 유일한 아들인 우리 삼촌. 우리 엄마한테는 참 소중한 가족이라서 알뜰히 챙기지만 나는 엄마 딸이라서 엄마가 이젠 좀 짐을 내려놓으시고 본인만 생각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엄마도 강철이 아닌데이젠 엄마도 쉬어야 하는데내가 빨리 더 노력해서 우리 엄마 편하게 해드려야 하는데내가 본 우리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낙관적이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는데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오늘날까지 오기 참 힘이 들었을 텐데. 힘든 내색 한번 내지 않고 엄마가 내 엄마라서 참으로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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