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문학관을 방문하고

우리 조선민족의 우수한 하늘바람 별의 시인인 윤동주 선생을 찾아 렌터카인 쏘카차를 빌려몰고 내가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윤동주문학관을 방문한 것은 지난 83일이였다. 쏘카에 설치된 네비게이션과 스마트폰에 설치한 아틀란 네비게이센의 안내를 받아가며 내가 살고 있는 구로구 가리봉에서 종로구에 자리잡은 윤동주문학관까지는 약 40분시간이 걸리였다.

 

윤동주 선생의 모교 중국 용정중학교에서 중등 고등교육을 받으며 학창시절 문학 애호가로 활약해 온 나 자신에게 있어서 이번 이 길이야말로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윤동주 시인이 언제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여왔고 그가 저항시인으로 우리 민족의 문학사에서 이룩한 사적 등등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가 중국 용정에서 공부했던 우리 조선민족의 우수한 하늘 바람 별의 시인이라는 사실이 용정중학교에 알려진 것은 아마 1986년 일본의 한 지인이 윤동주 사적을 용정중학교에 알리고 당시 용정중학교에서 역사교원으로 계시다가 학교영도로 부임된 한생철 선생과 함께 용정동산에 묻혀진 신인의 묘비를 발굴한 때로부터라고 어느 신문지상에서 본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용정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는데 마침 그때로부터 용정중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시인 윤동주 선생을 널리 선전하고 시인의 고귀한 넋을 학생들에게 보급하고 윤동주 선생의 시편들도 학생들에게 선전한 때라 워낙 문학에 흥취가 있었던 나자신에게는 실로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과 같은 그런 느낌이였다.

하여 나는 그때로부터 시인의 주옥같은 시편들에 매혹되어 윤동주 시인의 시편들을 하나둘 읽어가며 문학의 푸른 꿈을 키워왔다.

 

용정중학교에서도 학생들 속에서 문학에 흥취가 있고 또 문학에 소질이 있는 학생들로 글짓기 소조를 만들고 매주 한 차례씩 글짓기 지도를 하고 글짓기평론도 하며 문학에 흥취가 있는 학생들을 고무 격려하기 위하여 윤동주문학상도 설치하고 윤동주 선생의 탄생일인 1230일이면 윤동주문학상 시상식도 가져 학생들의 글짓기를 적극 지지하여 왔고,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서 따온 별을 이름으로이라는 교내등사본 잡지도 창간하였으며 해마다 청명추석 때가 되면 글짓기 소조학생들과 함께 시인 윤동주 선생의 묘비에 가 참배활동도 벌였다.

 

저 우물이 바로 용정 명동에 있는 시인의 생가에서 가져온 우물입니다.”

윤동주문학관 책임자 선생님께서 내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전시관에 진열된 삵아빠져 손만 살짝대도 부서질 것만 같은 나무로 만든 우물케이스를 가리키며 나에게 말하였다.

 

! 바로 이것이 였구나!’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남을 느꼈다. 그것은 당시 내가 용정시 지신진 명동촌에 위치한 윤동주생가를 방문할 때마다 이 우물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했었는데 오늘 한국 땅에서 이 우물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순간 나는 문학지도 교원 선생님이 그리워졌다,

용정중학교정에 세워진 윤동주 선생의 시비를 보며

시인의 넋이런가!

고귀한 영혼을 받들고 용정중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섰습니다.

라고 시를 써 읊으며 그토록 감개무량해 하던 나의 고중시절 국어담임교원인 박동철 선생님. 헌데 지난해 나와 함께 세탁기능사 공부를 하던 박선생님의 친형님을 만나 박 선생이 보름 전에 저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비보를 받았던 나 자신은 이 시각 박동철 선생이 사무치게 그리워 졌다.

만일 박 선생이 살아계셨더라면 카카오톡으로나마 통화하면 얼마나 기뻐하랴는 생각에 마음이 서글퍼졌다.

잠시나마 이곳에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렌터카반납 시간이 지연되랴 싶어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시인의 시비를 돌아보고 귀로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자동차 핸들을 잡고 달리면서 몇 십 번이고 윤동주 선생의 서시를 마음속으로 읊고 또 읊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저작권자 © EKW이코리아월드(동포세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